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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주문제 신라역사(3)  
hanbark33  l  2019-02-11 조회 : 183    

제28주문제 신라역사(3)

1). 신라기록 소개


7. 통전(通典):
“신라국은 위(魏)나라 때의 신로국(新盧國)으로 그 선조는 원래 진한(辰韓) 종족이다. 처음 6개국(읍)이었다가 점차 나누어져 12국이 되었는데 신라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왕이 옥저로 피난하였다가 돌아갔는데 거기에 남아있던 자들이 신라로 되었다.“


8. 당회요(唐會要):
“신라는 원래 변한의 땅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자 옥저로 달아나 그곳을 지켰다. 나중에 돌아가지 않고 신라로 되었다. 그 나라에는 김, 박 두 성씨가 가장 많고 성씨가 다른 사람들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백제 땅과 고구려 남쪽지경까지 모두 점유한 뒤에는 동서 약 9백리요 남북이 약 1800리 였다.”

9. 唐. 張九齡集. 與新羅金興光勅(흠정만주원류고 P.177 張九齡集)
“경이 패강에 군영을 설치하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발해의 요충지와 마주 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록산(安祿山)과도 마주 바라보고 있어 원대하고 좋은 계책이다---”
(해설)
모두 지난주(27주)와 내용이 같으므로 여기서는 패강과 안록산만 해설하겠다.
나당연합군이 섬서성의 비류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가 패수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에 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에 따라 신라가 패수지역에 군사주둔지를 건설하니 이것을 승인한다는 서신이다.
그런데 그 위치가 당나라 안록산의 난으로 유명한 고구려 환도산을 당나라가 안록산이라고 했는데 안록산과 마주보는 곳이면 감숙성 패수이남 땅 즉 대방 땅의 북쪽경계에 신라가 군사주둔지를 건설하는 모양새로 나타난다. 패수북쪽은 발해가 점령한 고구려 땅이니 발해가 어떤 군사시설을 해서 그것을 발해의 요충지라고 표현한 것 같다.
즉 발해와 신라는 패수, 대수. 한수인 지금의 위수(渭水)를 경계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방 땅과 그 북쪽의 발해 땅까지 토번에게 점령되었으므로 통일신라와 토번과의 전쟁, 발해와 토번과의 전쟁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신라와 발해를 한반도로 이동 조작했으므로 삼국사기와 발해사에서 이런 기록을 모조리 삭제한 것이다. 


10. 당육전(唐六典):
“하남도(河南道)가 신라에서 공물을 바치는 것을 통제했다.”(흠정만주원류고 p.169)
※하남도(河南道)(중국고금지명대산전 P.516):
“당태종 초에 황하 이남에 설치해서 이름이 되었다. 동쪽은 바다, 서쪽은 함곡관, 남쪽은 회수, 북쪽은 북박의 황하다. 지금의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의 황하 이남이고 강소성, 안휘성의 회수 이북의 땅이다. 치소는 하남성 낙양현 치소이다. 개원중(713-741년: 당나라 예종∼8대 현종초) 분할해서 도읍 직할도를 설치하고 하남도의 치소를 변주로 바꾸었는데 지금의 하남성 개봉현 치소다.(唐貞觀初置在黃河之南. 故名. 東盡海, 西據函谷, 南濱淮, 北薄於河. 今河南, 山東 黃河以南. 江蘇, 安徽淮水以北之地. 治今河南洛陽縣治. 開元中分置都畿道. 河南道改治汴州 今河南開封縣治)”
(해설)
 기록상으로는 하남도는 당나라가 낙양이동지역에 설치한 도단위 행정구역이다. 그런데 산동성 남쪽의 황하와 안휘성의 회수사이에 어떤 나라가 있다는 기록은 없고 한반도에 있는 신라가 낙양에 있는 당나라 도읍에 조공하는 것을 방해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도읍이 섬서성 서안이고 동경이 하남성 낙양이라는 기록들은 청해성에서 이동조작된 가짜이니 역사의 혼란을 부추기는 이런 기록들을 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문장은 소개하는 것으로 끝내겠다. (그림참조)





※마한(금마백제), 진한, 변한을 한반도로 이동 조작하고 소위 “원삼국(元三國)”이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유우찬 저 “한국사의 실체” 참고)



2). 신라건국설화의 특징.


1. 습속
“매년 초하루에 달 신을 경배했다. --- 부인들은 머리털로 머리를 둘러 감싸고,”(27주 3-⑥번)
달신을 경배하고, 부인들이 머리카락으로 머리를 감싸 둘렀다는 특이한 문화는 지난주에 신라가 중국 동부의 역사도 될 수 없고 더구나 한반도역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신라여인들의 머리장식: 전형적인 묘족이다.(2019. 1. 31. 중회TV에서)



2. “동명”
신라사를 결정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동명(東明)”이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을미년(BC.86년) 한나라 소제(昭帝: BC.87-74)때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국(東明國)이라 하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삼성기 상편)
(해설)
삼성기 상편의 저자는 안함로(安含老)다. 한문은 고대까지 우리말의 발음기호로 많아 사용한 하급문자인데 이씨조선시대에 양반의 글자로 탈바꿈 되었다. 따라서 안함로의 글자는 여러 가지로 쓸 수 있다. 신라에는 3선(三仙)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성씨가 바로 안씨(安氏), 함씨(咸氏, 含氏), 로씨(魯氏, 盧氏, 老氏)의 세분으로 추정되며 3선인이 알고있던 역사지식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삼성기 상편이므로 신화적 요소와 선도적인 요소를 없애면 대체로 신뢰성이 높은 기록으로 추정된다.
사로(계림)는 단군의 단국과 색부루의 조선 땅에 있었기 때문에 3선인은 대체로 맞는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지며, 신라 30대 문무왕이 된 김법민이 당나라에 갔다든가, 신라스님들이 당나라에 갔다는 것들은 모두 계림과 당나라가 붙어있는 이웃나라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최치원이 계림에서 북쪽으로 수백리 떨어진 묘향산 석벽에 천부경을 새겼고, 계연수가 이를 발견하여 탁본을 단군교에 보냈다는 묘향산도 고구려 환도성 북쪽 90리에 있는 불교사상의 뿌리산인 수미산이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백악산아사달”은 원래의 도읍지인 환도산을 말하지만 동경(東京)인 감숙성 경성(慶城)과 서경(西京)인 장당경(감숙성武威)으로서 3개소를 다 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단군의 도읍과 부도읍지가 모두 백악산 아사달로 불러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요임금은 감숙성 요동의 평양(최초의 당 땅, 태원)에서 단군에게 쫒기어 요서의 감숙성 무위(장당경)로 천도했는데 이곳이 두 번째 당 땅이고 태원이며 당나라 이세민의 고향이며 요나라 건국도읍지다. 단군이 다시 요임금을 돈황지역으로 쫒아내고 그 땅에 단군의 셋째아들 부여를 봉하여 최초로 부여국을 건설한 부여의 도읍지이고, 흉노족인 색부루조선의 초도(初都)이고, 후세의 대부여 서울인 장당경이며, 전북부여 해모수의 도읍이고, 후북부여 고두막(동명왕)의 도읍인데 흉노 곤사왕이 점령하여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한나라가 흉노 곤사왕의 항복을 받고 한4군중에서 진번군의 치소로 사용한 진번성이다.
 흉노의 세력에 밀려 후북부여 시조 고두막칸(동명)이 란주지역으로 천도했다. 그래서 최초의 동명은 졸본이고, 두 번째가 감숙성 무위(장당경)이고, 세 번째 동명이 바로 감숙성 금주(金州: 金城: 錦州: 현재의 란주)인데 이곳이 사로의 건국지다. 본문에서 “신라의 옛 땅“이라고 하여 두 번째 동명으로 기록한 것은 착오로 보인다. 그곳은 신라 이전에 흉노족의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미 동명이 아니다. 혹시 사로에 합류한 흉노족을 중심으로 쓴 기록이라면 두 번째 동명인 감숙성 무위를 ”신라의 옛 땅“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졸본에서 후북부여를 건설한 동명왕 고두막한(북부여5세 BC.108년)이 전북부여 왕 해부루가 항복하니 제후로 삼아 분능(동부여: 가섭원부여: 최초의 현토군 땅으로 추정)으로 옮기게 하고 전북부여 도성(장당경)을 접수한 것은 BC.86년이다. 이 때는 서쪽의 훙노와 남쪽의 한나라가 침략할 때여서 고두막한은 도읍을 감숙성 란주지역으로 천도했다. 바로 세 번째 동명이며 사로의 발생지인 금성(金城)지역이다. 최초 금성군(金城郡)은 한나라 때 감숙성 란주지역과 청해성 서녕지역을 합해서 만든 군단위다. 한(漢), 진(晉) 때의 최초치소는 서황하 서쪽변에 있다가 수나라 때 란주지역으로 옮겼다. 서황하 서쪽인 청해성 땅은 한, 진, 위, 수, 당나라 땅이므로 서황하 동쪽인 란주지역이 사로건국지다.
사로의 토박이 주민은 치우의 묘족이며, 단군의 동이족이 들어가 살게 되었고, 뒤를 이어 백인흉노족의 나라인 고조선시대에는 흉노족이 들어가 함께 거주했고, 북부여의 천도로 부여족이 함께 살게 되었으며, 후에 흉노 곤사왕(혼야왕)의 일족이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기록대로라면 고구려의 부여족과 에맥족도 함께 살게 된 다민족국가다. 대페로 백성들은 묘족, 흉노족, 부여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지만 4700년 전의 치우시대 이전부터 치우족의 근거지였으므로 가장 많은 백성은 역시 묘족이다. 주로 흉노족계열에서 달을 숭배했고, 해의 아들인 치우의 후손들인 묘족과 동이족은 태양을 숭배했다.
묘족(苗族)의 뜻은 벼를 심을 때 벼씨를 뿌려 모를 길러서 옮겨 심어야 벼로 자랄 수 있는데 그 벼씨나 모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중국대륙의 뿌리민족이란 뜻이다.
아시다(한반도) 서해와 남해는 원래 육지였는데 이 땅에서 살던 마드(Math)민족이 대략 11500년 전의 개벽 이전에 엄청난 해일을 피해 몽골로 이동했다가 파미르 아래 타림분지로 가서 나라를 세운 것이 끝마님(중국명칭 마고)이다. 부도지에 의하면 처음에는 지유(地乳)라는 것을 먹고 살았는데 점차 인구가 늘어나니 식량난이 되어 제일먼저 백인족의 한 지파인 지소씨(支巢氏)가 포도를 따먹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풀과 열매를 먹으니 신인(神人)이 인간계로 추락했다. 이에 사람들이 지소씨를 원망하니 부끄러워 성을 나갔는데 현재 돈황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을 오미의 난이라고 한다. 이 백인족을 후세에 흉노족이라고 했는데 요임금의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요임금을 흉노족으로 분류하며 돈황은 요임금 일족의 고향이다. 그런데 단군에게 두 번이나 쫒기어 결국 돈황지역으로 천도하여 순임금∼ 하나라로 이어졌다.
오미의 난 이후 장자 황궁이 회의를 열어 4족분거를 결정하니 황인종은 당시의 방위로 동북(천산과 알타이산 사이)으로 가고, 백인족은 서북(천산 서쪽)으로 가고, 흑인종은 서남(인도)으로 갔는데 청궁씨는 동남쪽 운해주(雲海州) 즉 중국청해성 청해호(雲海州) 지역으로 왔다. 그래서 중국의 벼씨족속은 청궁묘족이므로 최초의 토박이 족속이라고 해서 묘족이라고 한 것이다. 황궁과 청궁은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씨다른 형제다.
중국의 묘족은 북묘족인 청궁묘족이 있고 남부의 남묘족이 있다.
일본은 남묘족의 터전인 월남지역에 동이족이과 북묘족이 가서 점령하여 왜국을 건설했는데 후세의 일본이다. 현재의 일본열도는 중국의 이씨조선을 점령했으나 서구열강의 압박으로 월남지역에서 이동한 족속이기 때문에 묘족도 있다. 일본에서 한국에 들어온 불교의 일파인 “남묘호렝겡교“라는 종교가 일본에 존재하는 이유다.
묘족은 피부색갈이 청흑색이어서 치우 때는 리국(黎國)이었으므로 일명 리족(黎族)이라고도 했는데 후세의 순임금 때는 묘족, 고조선 때는 람족(藍族), 청해성의 토박이민족이니 청해성의 주(周)나라 때는 로(魯, 盧)라고도 했는데 공자의 노(魯)나라 중심민족도 묘족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秦∼漢 시대에는 묘강 또는 강(羌)족, 그 이후에는 리(黎)와 로(魯,盧)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신라이름이 정식으로는 사로(斯盧)이다. 즉 신라의 대표민족이 묘족이란 뜻이다. 사로를 “사라(斯羅)”로도 불렀는데 “로“의 발음을 ”라“로 고친 것이다. 그런데 기록상으로는 명나라의 로(盧, 魯, 虜, ---)의 발음을 청나라가 ”라(羅)“로 고쳤다. 그러므로 신라본기는 청나라 이후에 써진 책으로서 일제 때 조작된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역사조작으로 청해성의 수나라, 당나라를 섬서성 서안이 도읍인 것처럼 옮기고 비류백제 땅인 중국 중앙지를 수나라, 당나라 땅으로 만든 후에 원래 청해성의 당나라 동쪽에 있었던 요수를 산서성 동남쪽 현재의 청장수로 옮기고, 요수 동쪽인 동명과 서나벌(낙랑군)은 하남성 동북지역으로, 서나벌 경주(慶州)는 요나라 때 개봉부(開封府)로 바꾸었는데 후에 하남성 개봉부로, 금성과 월성은 동남쪽 강소성 남경일대로 이동 조작되어 있다. 그러나 동해변은 태양을 숭배하는 땅인데 월성을 갖다 놓았으니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동 조작된 역사는 원래의 위치와 방향이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이다.
북부여기에는 (후)북부여 6세 고무서가 요동의 서안평으로 옮겨와서 졸본에서 즉위했는데 처음 건국지인 졸본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BC.57년 고주몽이 대통을 이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북부여의 마지막 도성은 처음 나라를 세웠던 졸본인데 고주몽의 건국지도 졸본이다. 동명왕 고두막칸과 고주몽이 다 “동명”이란 호칭을 사용했는데 고주몽이 북부여를 계승했기 때문에 동명성왕이라고 부르는지 그 연원은 알 수 없다.
고구려를 한반도로 이동조작하기 위해 북부여와 고구려를 분리했다면 원래의 고구려 시조는 고두막칸이 되며 고구려 건국연대는 BC.108년인데 전북부여까지로 계승한다면 고구려 시조는 해모수가 되고 건국연대는 BC.239년이고 최초 건국지는  환도산 남쪽 평양(舒蘭: 徐州)이다. 해모수는 평양에 있다가 대부여가 도읍지인 감숙성 무위에서 5加가 공화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5加를 회유해서 나라를 통일하고 BC.232년에 도읍을 감숙성 무위(장당경)로 옮긴 것이다. 
                                                                 2019. 2. 12. 
                                                                한국상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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