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機포럼 安保特講 20-3회 정전협정 비사
2020. 7. 27(월)
安民硏究所長
文 會 穆
停戰協定 秘史
경 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1년 초반까지 반전을 거
듭하면서 혼란스러운 전개과정을 보이고 있었다. 전쟁 발발 후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었고, 두 달 만에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유엔은 침략군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한국에의 파병을 요청하는 결의안에 따라 16개국이 참전을 하였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참전으로 전세는 반전되기 시작하였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0월초 유엔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을 시작하여 승리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북한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중국이 참전하였고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을 무색케 하였다. 결국 1950년 11월 말부터 유엔군은 후퇴를 해야 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유엔군은 1951년초 재 진격을 하여 전쟁이전 상태로 영토를 회복하였다.
중국군의 진격이 봉쇄되고 1951년 봄에 유엔군이 침략자를 38선 이북으로 퇴각시키는 반격을 시작하자, 미국과 연합국 정부들은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중국군에 의해 야기된 모욕적인 퇴각을 경험한 유엔측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정치적 협상에 의하여 전쟁을 종료시키기를 원하고 있었다. 공산측도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군사작전은 아무런 결실도 없는 소모전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하고 협상에 임하게 된다.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8일 양측에서 각각 3명의 연락장교가 개성에 모여 예비회담을 개최함으로 시작되었다. 곧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휴전협상은 만 2년 이상이나 걸렸으며,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3년 1개월 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회담장소의 선정
한국전쟁을 종결짓는 휴전제의는 소련이 먼저 하였다. 1951년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Jacob Malik)가 휴전을 제의하여, 6월 30일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 유트란디아에서 휴전회담의 개최를 제안하였다. 이에 공산측은 7월 1일 회담장소는 개성으로 하고 회담개시일은 7월 10일부터 7월 15일 사이에 할 것을 제의하였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7월 3일 공산측의 휴전회담 제의를 수락하면서 7월 5일이나 그 후에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휴전장소를 놓고 모택동과 스탈린 사이에 의견 교환이 있었는데, 스탈린은 원산지역이 회담장소로 적절치 않음을 지적하는 한편 덴마크 병원선을 회담장소로 하는 것도 단호히 거부하고 38도선상에 위치한 개성지구에서 실시하는 것을 관철하라고 지시하였다.
공산측이 덴마크 병원선인 유트란디아호를 회담장소로 반대한 이유에 대해 회담을 위해 선박에 승선하는 모습이 마치 일본이 미국의 미주리 전함에서 항복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측이 회담장소로 개성을 선정한 것은 개성이 공산측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이며, 유엔측 대표들이 개성으로 간다는 것은 공산측을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들한테로 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유엔측이 휴전이 절실한 입장이기 때문에 휴전협상을 요청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굽신거리면서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는 공산측의 술책이 그 속에 숨어 있었다.
북한이 자기 지역에서의 회담을 끈질기게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이 설치한 무대에서 자신들이 짠 각본대로 연출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우월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회담장소로 자기측 지역으로 고집하는 이러한 행태는 휴전협상 장소로 당시 북한측 관할 지역인 개성을 주장한 이래 지금까지 회담이 있을 때마다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북한은 남북간 회담장소로 여러 차례 평양을 주장하였으며, 상호방문의 경우에도 평양에서 먼저 개최할 것을 주장하고 있고, 정상회담 제의 시에는 어김없이 평양을 고집하고 있다. 1985년 9월 4일∼6일간 김일성의 친서를 휴대하고 서울을 방문한 허담 비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제의하였다. 김영삼과 김일성의 정상회담 개최문제 협의 때에도 평양에서 먼저 개최할 것을 주장하여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1차 회담은 평양에서 먼저하고 2차 회담은 쌍방 정상이 결정하도록 합의하였으나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회담은 실현되지 못했다.
2000년 6월 13일∼15일간 남북정상회담 시에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였으며, 김정일의 답방은 실행된 바 없다. 2000년 8월 12일 평양을 방문한 한국언론 사장단과의 대담에서, 세계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하여 해외여행을 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받고, 김일성은 자신이 큰 나라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고, 평양에 앉아 있어도 여러 열강에서 자신을 만나러 찾아온다고 답변한바 있다.
중국이나 소련도 언제나 외국과의 협상을 자국 영토 내 특히 자국의 수도에서 개최하려고 한다. 이들 국가가 자국의 영토에서 협상을 고집하는 것은 우선 회담 일정을 자국에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고 정부 내부의 정책결정을 용이하게 하고 체제 선전을 할 수 있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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