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댓글 내용을 남겨주세요. 최대 글자수를 초과하였습니다. 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징검다리
  • 작성자 : 안충준
  • 작성일 : 2012.12.10
  • 조회수 : 8487

징검다리

 

  1963년, 벌써 49년 전 일이 되었다. 나는 충주사범학교를 막 졸업하고, 충북중원군 앙성면 능암리에 있는 능암초등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550여명의 학생들을 10여분의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당시에는 조그마한 학교였다. 나는 이 학교의 막내둥이 선생이었지만 그 때 훌륭하신 교장선생님과 여러 선배 선생님들의 따듯한 배려로 별 어려움 없이 즐겁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곳은 구릉과 바윗돌이 유난히 많은 벽촌이었는데, 나는 「산전이」라는 마을에 하숙집을 정해놓고 「느트쟁이」에 있는 능암학교로 출퇴근을 하였다.

 

  「산전이」에서 「느트쟁이」로 가는 길목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하나있었다. 폭이 불과 20여 미터 밖에 안 되는 개울이었지만 해마다 장마가지면 웬만한 샛강 정도는 될 만큼 넓어지곤 했다. 평시에는 스무 개쯤 되는 돌로 징검다리를 놓아 학교 가는 꼬마들로부터 일 나가는 어른들까지 이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하지만 이 개울은 한번 장마가 지면 나도 이렇게 커질 수 있다고 폼이라도 재듯 샛강만 하게 넓어져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을 묶어 놓는 심술을 부리곤 했다.

 

  그 학교에 부임한지 두어 달쯤 지난 어느 날 고향에서 어머님께서 찾아오셨다. 나는 어린애처럼 기뻤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밀렸던 세탁물이 처리될 것이 고마웠던 것이다. 어머님께서 오신 다음 날 말끔히 빨고 다려주신 흰 와이셔츠에 곤색바지를 입고, 내가 아끼던 검은 양말에 흰 고무신까지 말쑥하게 차려신고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에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건너던 그 징검다리를 건너다 기우뚱하던 돌을 잘못 디뎌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만 저만 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물벼락 맞은 생쥐 같은 모습을 보신 어머님께서 웃으시며 물으셨다.

 

  “개울물에 빠졌구나?”, “네...” 나는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럼 징검다리 돌은 제자리에 바로 놓고 왔느냐?” 어머님의 뜻밖의 물음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요” 나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끼 이 녀석아! 네가 무슨 선생이냐!” 대뜸 꾸중이 떨어졌다. “어서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와! 다른 사람들이 건너다 또 빠질 것 아니냐?”

 

  어머님의 엄한 꾸중에 나는 젖은 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는 곧장 개울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내가 밟고 넘어졌던 기우뚱 한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다. 그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때 어머님의 꾸중이 얼마나 커다란 가르침이셨는지를 거듭 깨닫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 뜻을 뼈에 새기며 살아오면서, 이 교훈을 다시 한 번 더 다짐해 본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고의성이 있든 없든, 나의 실수든 아니든, 나와 관련된 일로 인하여 남에게 조그마한 불편이나 피해를 보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어머님의 가르침은 언제 생각해도 그 어떠한 성인의 가르침보다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문뜩 서산대사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에,
  행여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걷는 내 발자국 하나가
  반드시 후인의 이정표가 될 테니.

 

(이 칼럼은 필자가 늘 어머님의 가르치심을 잊지 않고 마음속 깊이 명심하고 있던 중, 베트남전참전 당시, 생사의 치열한 싸움터에서, 전사하더라도 어머님께서 주신 교훈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 고국에 있는 월간지 “샘터”사에 기고하여 1972년 6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