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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초딩시절의 추억 단상(斷想)
  • 작성자 : rainbow
  • 작성일 : 2014.04.01
  • 조회수 : 10006

 

지난주 화창한 봄날에 초등학교를 찾았다. 59년 졸업 후 55년 만의 첫 홈컴잉(homecoming)이다. 수년전에도 우연히 학교 앞을 지난 적이 있었지만 여유를 갖고 제대로 둘러보기는 처음이다. 이번에도 마음으로 벼르고 찾은 건 아니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신설동 안감내(안암천의 옛이름) 추어탕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모교인 종암국민학교(그때는 초등학교라 부르지 않았다)가 가까우니 한번 가보자고 해 즉흥적으로 가게 된 것이다. 마침, 네 친구 중 셋은 초딩 동창이고 다른 친구는 어린 시절을 인근에서 보낸 추억이 있었다.

 

낮술에 취한 탓인지, 초딩시절의 그리움 때문인지 우리들 마음은 벌써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아련한 추억여행에 빠져 들었다. 예전엔 안감내에서 종암학교까지 골목길이 거리가 꽤 먼 것 같았는데 이제 보니 지근거리였다. 골목길 왼편에 있던 고급양옥들은 사라졌고 대신 낯선 주택과 빌딩들이 들어섰고 더러는 낡은 구식가옥들이 남아있어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싶다. 나중에야 그 고급양옥들이 은행사택인걸 알았지만, 모두가 어렵게 살던 전후시절, 어린 동심에도 거기 사는 사람들이 부럽고 대단해 보였던 것 같다.

골목길이 끝나면 종암 사거리로 가는 큰길이 나오고 그걸 건너면 학교정문까지 좁다란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옛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길가에 있던 ‘또뽑기’, ‘솜사탕’, ‘만화책방’, ‘문방구’ 등은 흔적도 없다. 등·하교길 어린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추억의 편린(片鱗)들인데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요즈음엔 초등학교 부근에 그런 것들은 얼씬도 못하게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학교 벤치에 걸터앉아 피곤한 다리를 쉬며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운동장에서 철없이 뛰노는 아동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운동장 오른편에 있던 교실건물은 없어졌고 놀이터는 남아있다. 거기서 철봉에 매달리고 그네도 타고 모래밭에서 씨름도 했었는데. 운동장 왼편에 강당이 있었는데 새 건물로 바뀌었다. 당시 강당은 우리 모두의 애정의 산물이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수년간 빈병과 폐지를 열심히 거두어 모은 돈(말하자면 어린학생들의 손때 묻은 돈)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강당 준공식에서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가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새 강당에서 열린 어린이 연극에 출연한 적도 있다, ‘별주부전’으로 기억된다. 거북이의 꼬임에 빠져 용궁에 간 토끼가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꾀를 내어 살아나온 이야기다. 나는 토끼를 호송하는 새우포졸 역을 맡았던 것 같다.

 

가을운동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가을이면 운동장과 강당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행사들 특히 100미터 달리기, 릴레이, 줄다리기, 기마전, 풍선 터뜨리기 등 지금 생각해도 신나고 즐거운 순간들이다. 그때는 부모, 가족들도 다 함께 와서 응원하고 놀아주고, 준비해온 김밥도 먹고 하는 축제무드였으니까.

 

거짓말 같지만 초딩시절 노래를 엄청 잘 불렀다.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운동장 단상에 올라 노래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내 교향으로 날 보내주’, ‘방랑 김삿갓’이 18번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쩌다 졸업후 첨 만난 초딩동창들은 내 노래를 다시 듣고 싶다고 조를 정도니까. 하지만 정작 나는 초딩시절에 노래하는 게 싫었다. 3,4학년땐 담임이 마침 음악선생이었는데 자주 노래를 시켰고 소풍이라도 가면 의례 노래 부르라 지명하는 바람에 그게 싫어 피해 다닌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좋은 목소리를 잘 살렸더라면 조용남, 파바로티 못잖은 가수로 대성(大成)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자랑 같지만 공부도 잘 했고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곧 반장을 맡았다. 집안은 가난하지만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으로 많은 급우들과 선생님의 기대를 받았다. 6.25동란직후 다들 어려운 시절이라 도시락도 싸오지 못하는 애들이 많았고 도시락 반찬도 김치, 고추장, 콩나물, 콩자반이 고작이었다. 계란부침이나 멸치볶음, 아부래기(어묵볶음)가 든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들을 속으로 부러워들 했다. 그 시절도 소위 치맛바람은 있었다. 치맛바람 때문에 가끔은 보이지 않는 시샘과 견제도 받은 것 같다.  세월이 한참 흘러 내 자신 또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가 되어보니 그 모든 게 다 이해가 되고 별것도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종암국민학교의 빼 놓을 수 없는 자랑꺼리는 국내외에서 학생 수가 제일 많다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조회 훈시마다 강단에 올라 학생 수가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학생 수가 거의 8천여 명에 달했다. 그래서 한반에 80~100명씩 15~17반까지 있었고 저학년들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교대수업을 받아야 했다. 전쟁직후라 학생들은 몰려들고 교실은 모자라 그랬던 것 같다.

교장실이 있는 건물본관으로 다가가 현관에 걸린 게시판을 보니 놀랍게도 지금은 학생 수가 7백 명도 채 안 된다. 작년에 87회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적혀 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32회가 되는 것인가.

 

본관건물 앞 작은 정원에 있는 백년은 됨직한 향나무 두 그루와 초딩시절에도 본 듯한 녹슨 세종대왕 동상을 빼 놓고는 모든 게 다 변한 것 같다. 한 세월 정신없이 살다가 이제 와 보니 모든 게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정했던 급우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아마 90대 노인이 되었거나 어쩌면 돌아가셨겠지. 세월의 무상함과 격세지감이 밀려든다. ‘추억은 공간속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있다’는 말에 실감이 간다. 기념사진을 위해 스마트폰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초딩친구들의 백발(白髮)이 카메라렌즈 속으로 서서히 클로즈업(close-up)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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